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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로> 찾기/오늘을 노래하다

<안녕 헤이즐>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랑을 돌아보다


* 사진은 다음 영화 에서 가져왔음.




<안녕 헤이즐> 이 영화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평범치 않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을 만나게 된다.

시한부 운명을 바꿀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했고 자신을 아꼈고 그속에서 행복을 느꼈으며,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라는 작별인사에 그들은 괜찮다(오케이)고 환하게 웃으며 보내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영화를 본다면, 놓지지 말아야 할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어거스터스(남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꼭 놓지지 마시라!, 그리고 헤이즐(여 주인공)부모님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를 꼭 눈여겨 보시라! 고 말이다. 물론 영화는 여주인공 헤이즐에게 맞추어져있다. 하지만, 헤이즐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하나의 시한부 청춘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고 친구와 어떻게 아픔을 공유하는지를 조금은 눈여겨 봤으면 한다. 


헤이즐에게 다가온 사랑은 병자 혹은 환자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주는 따뜻함...아마 그것이 헤이즐에게 닥쳐온 사랑하는 남친의 죽음(모든것을 잃은듯한 그 순간) 마저도 기꺼이 웃으며 '괜찮아'라고 답해주게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다리는 암투병환자가 아니라 18세 소녀로 그녀를 아낌없이 사랑해준 한 소년으로부터 받은 관심, 소통, 공감..아마 그것이 그들의 인생이 비록 짧았지만.. 그 모든것을 내려놓아도 아깝지않았다고 삶의 무한대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기꺼이 말할수있게 만든 것..아닐까? 


나는 이들 청춘의 사랑이 시한부여서 눈물이 나온것이 아니였다. 이들이 진정 사랑을 할줄 아는 청춘이였기때문에 눈물이 나왔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사랑을 했고 사랑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사랑하며 살아갈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사랑이 서로에게 무한대의 삶을 안겨주는 사랑이였다라고 그런 사랑이라고 선뜻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사랑할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단순히 시한부인생의 특별한 사랑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으면 좋겠다. 


시한부 인생이라고 해서 꼭 이런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이들보다 조금더 오래 산다고 해서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하라는 법도 없기때문이다. 

이들이 (바꿀수없는 운명같은)정해진 짧은 생에서 자기존재, 타인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아껴가는지를..그리고 그것이 특별한 여건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사람이기때문에 필요로 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눈물이 많다. 그렇다고 울고짜고 하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 냉혈인?이다. (억지스런 눈물엔 왜? 피가 거꾸로 솟듯이 더 냉정해지는지..)

그런데 이영화는 나를 녹여버렸다. .헤이즐 어머니의 환한 미소때문이였다. 영화는 그런 설명은 하나도 없었다. 대사도 그리 많지않다. 환한 미소만이 가득한 헤이즐 어머니의 모습은...수많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남몰래 울었을 눈물이 얼마만큼이면 죽어가는 딸앞에서 그렇게 환한 웃음을 보일수있을까 하고..그 숨죽여 울었을, 그 수많은 순간과 찰라들이 느껴져서..나는 울었다. 


나는 그 미소가 이 영화의 전부를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죽어가는 딸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아껴주는가를 말이다. 헤이즐 부모는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장면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장면 하나 하나마다 숨겨진 그들의 애절하고 간절한 사랑이 농으로 주고받는 대화에도 느껴졌다. 아마 이 부분을 놓치지않고 본다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그리고 헤이즐이 느끼는 사랑, 삶, 죽음에 대해.. 잔잔하게, 그리고 가슴 절절하게 전해준다. 

13살때부터 암이라는 병을 앓고 항암제를 맞으며 죽을날만을 기다리는 해이즐.. 그녀는 오로지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를 위해 기꺼이 암치료모임에도 나간다. 하지만 무미건조하고 우울한 하루를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멋진 청년이 나타났다. 그녀을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 '병이 언제 걸려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얼만큼 아픈지'가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사람, 그녀가 진심으로 절박하게 원하는 소원이 무인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 그 소원을 이루게 하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눠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사람과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쓴사람에게 그 책의 끝마무리를 꼭 직접 듣고 싶다는 소원을 가꾸어간다. 그리고 그 소원과 마주친다. 

그 소원이 비록 기대를 져버리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었고 깊게 만들어주었다. 헤이즐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무미건조하고 죽어가고있는 자신의 생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하지않았던 지루하고 막연했던 하루가..이젠 달라졌다. 

그리고 남은 숙제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것...그래서 자신을 시한폭탄이라 여기며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사랑을 받는다는것..그것이 남겨질 이들에게 고통이라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로의 예정된 죽음에 추도사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가 사랑했던 순간이 영원을 안겨주는 기쁨이라는 것을 배우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을 10대의 풋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 귀한 사랑아닌가? 


요즘 우리사회는 사랑타령은 많이해도 사랑을 모르고, 사랑에 울고불고, 저마다 자신이 난 상처가 제일 큰것처럼 여겨서 연인과 헤어졌다고 상해를 입히고 살인까지 감행하는 사건도 너무많아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삐뚤어진 사랑이 왜곡의 범위를 넘어 사람을 해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이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상이다. 아니, 사랑을 모르는 것일지도..사람관계 자체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도..이미 잃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꼭 배워야만 할수있는 건 아니다.  비록 어리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삶이 더 치열할수도 있구 반대로 하루 하루의 삶이 더 고통스러울수도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앞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지를..보면서 

이들보다 조금은 길게 살지만 여전히 시한부인(언젠가는 다 죽으니깐) 우리들 삶에서도 '사랑' '죽음'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지않을까..생각해본다. 그 누군가를 충분히 사랑하기에는 여전히 모자란(짧은) 우리삶(생)이 아닌가..그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어거스터스(남주인공) 화법에 반했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것이 그가 죽음의 문턱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생긴 그만의 삶의 깊이인지는 모르겠다. 그도 어린 십대였지만, 삶에 능통한 철학자, 혹은 어딘가에서 도를 한참 닦고 온듯한 그의 말솜씨는..아마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움을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그의 치열한 삶에 대한 내공발..같은 느낌이였다. 

나는 헤이즐이 느끼는 영원한 순간보다 더 어거스터스를 만나 오히려 행복했다. 그가 헤이즐을 사랑하는 방식도 너무 좋았고, 자신의 추도사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구할만큼 모든것에 초월해보이는 그가 막상 자신의 죽음앞에 초조해했던 그 여린 소년이여서..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헤이즐에게 남긴 추도사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평소의 그의 말투처럼 말이다. 유머가 가득 담긴, <헤이즐  오케이?>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자신의 죽음에 오열하는 사람들을 향해..이런 말을 할수있을까.... 그리고 그 누가 죽은자가 묻는 이리 간절한 안부인사에 오케이로 화답 안하겠는가?.. 그가 죽어 심장이 멎도록 아프고 세상의 전부를 다잃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지만......그의 안부인사에.. 환하게 미소지으며 오케이라고 말할수있게 만드는 마력..

아마,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사랑이 였기때문이였으리라... 나는 그리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에 큰 박수를!!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을 돌아본다. 아니, 내사랑을 돌아봤다. 나도 순간을 영원처럼 치열하게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며 죽음앞에서도 남는이의 안부를 묻는...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이들보다 조금은 더 길게 살지 모르겠지만, 이들처럼 뜨겁게, 사랑도, 죽음도, 짧은 생을 살아가는 그 순간도 그 어느것도 따라갈수없음에..부러움도 담아보고, 나는 진정 그 누군가를 사랑하노라고 맘껏 외칠만큼 살고 있는지...되돌아 보게했다. 


최근 방영되는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도 어찌보면 일그러진 우리들의 관계들, 서로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이해...그것을 따져 묻는 건 아닐까?

한면으로만 사람을 보는 것..세상을 보는것..그건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첩경인지 모르겠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교황이 가난한자의 벗으로, 우리를 위로하러 왔다고 했다. 그분의 진심이 곳곳에서 느껴져서.. 직접 만나지 않아도..나는 위로받았다. 어찌보면 위로라는 것도..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진심이 담겨지면, 일그러진 사람관계도, 세상살이도.. 바꿀수 있는 뭔가의 힘!! 그것이 나오는 걸지도...


영화 <안녕 헤이즐>은 마치 내가 헤이즐이 된것처럼 그들 부모에게 간호를 받고, 어거스터스의 사랑을 받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가 묻는 안부에 나도 오케이(괜찮아~)라고 답하며 환하게 웃을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슬퍼서만 울지않는다. 기뻐서도 운다. 나는 기뻐서 울었다. 그들의 사랑이 왠지..우리 모두에게 생길것 같은..그런 희망 말이다.  





시한부인생이 주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 만들어가는 삶(생) 그리고 그 변화, 그것을 그린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이영화는 '오늘이 잔인한' 우리들 세상에..너무나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노라고 말이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시한부라는 암투병환자보다 더 잔인하게 미래에 저당잡혀 오늘을 꼼짝 달싹 못하며 안절부절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오늘>을 더 값지게 만들어주는 <사랑>을 더 나누고 가꾸는 용기를 주는 이야기라고...나는 이영화의 소감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