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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로> 찾기/오늘을 노래하다

<폭력과 존엄사이> 삶을 부셔트리는 국가폭력, 우린 무관할까?



<폭력과 존엄사이> 이책은 간첩조작사건으로 삶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산산히 조각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했기에 한자 한자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져오고 '사회'가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앞에 부서지는 나를 발견하게된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의 삶을 망가뜨려야 자기권력을 유지할수있다고 믿게했을까?

이렇게 사람을 부서지게해서 유지하는 권력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가?

무엇이 사람의 삶 자체를 망가뜨려도 된다고 초법적 권력을 안겨주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빼앗긴 그들의 하나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보상해주어야 하는가?

이들의 억울함, 이들이 겪었던 잔인했던 세월을 무엇으로 치유해줄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불쑥불쑥 튀여나오면서 가슴을 친다. 

하나같이 이들은(책에 나오는) 억착같이 살아냈다. 그 잔인한 세월을 처절하게 견디며 살아냈다.  삶을 끝내 견디지못해 '죽은이'들도 많았지만, 이들은 살아 '그날'의 아니, 그 잔인한 세월을 증언했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그들의 '일생'을 부셔버렸다. '삶' 자체, '산다는 것' 그 자체를 부셔버렸다.

 '간첩'이 필요했던 권력, 그들이 만든 '간첩'은 최소한의 인간이 누려야하는 기본조차도 부셔버렸다. 


과연 조작된 간첩만 삶이 부서졌겠는가! 조작된 간첩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의 삶도 부셔뜨렸다. 

그래서 그시절은 '진실'을 말하는 것도, '진실'을 마주하는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였고, '거짓'과 '국가폭력'앞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삶을 강요받았으니, '간첩조작사건'의 잔인함, 그 무게, 그 책임은 '개인'에게 뿐아니라 '그 사회를 살아간 사람들' 모두에게 무겁다. 


* <자백> 영화의 마지막 자막, 그간 간접조작사건 무죄판명된 사건들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확인하는건 그리 어렵지않다. 또, '진실'을 밝혀내는 일도 어찌보면 쉬운일이 속한다. 물론, '진실'을 밝혀내는데에도 너무나 긴시간이 필요했고, 너무나 잔인한 싸움이였다. '진실'을 따지는 순간부터 또다시 '간첩' 또는 '빨갱이'의 누명을 써야했기때문이다. 진실을 밝히는데 소비한 시간 또한 우리사회가 얼마나 잔인한 국가폭력이 확고하게 보장된 사회였던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였다. 


'간첩조작사건'으로 국가는 얼마나 자기권력을 튼튼히 틀어쥐었던가? 

개인의 삶을 잔인하게 빼앗아 누린 권력, 그 얼마나 추악한가!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빼앗지않고서는 유지할수없는 권력이니 그 얼마나 더럽고 악귀같은 자들인가!


'간첩조작사건'은 국가가 개인에게 자행하는 폭력중에서도 가장 간악하고 잔인한 것에 속한다. 간첩을 만들어야 했던 저들의 음흉한 목적에서부터 간첩을 만드는 과정, 간첩으로 낙인찍혀 '사람이 아닌 존재'로 일생을 살아내게 만드는 '최악의 인권 유린' 그 자체이다. 


이들을 벌하지않았고, 어디서부터 이런 권력이 가능했는지를 묻지 않았으니, 그들은 오늘날도 펄펄 살아뛰며 자기권력을 위해 사람들의 삶을 파탄내는것을 만만히 여긴다. 


조작에 대한 '진실'여부를 확인하는 것 뿐만아니라, '어떻게 이런 폭력이 가능했는가'를 우린, 이제 똑부러지게 따져 물어야 한다. 이것을 따져 묻지않는다면, 오늘도 내일도 지속되고 있고 진화되고 있는 '국가폭력' 그 잔인함을 밥먹듯이 마주해야 하고, 국가권력이 우리삶을 부셔뜨리는 것을 아무렇지않게 감내해내야하기때문이다. 설마, 아닐거 같은가?  


<언어의 배반> 책에 의하면, '테러'의 어원은 '국가가 개인에게 자행하는 폭력'이라고 한다. 이 어원에 기초하면 우린, 늘상 '테러'를 당하고 살아내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우린, 국가폭력이 만연한 잔인한 사회에 살고 있지않은가! 


*백남기 농민, 물폭탄에 사망하다'


가까운 '백남기'농민사건을 떠올려보자. 많은이들은 물대포가  '공권력'의 남용이고, 폭력이라 여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어마어마한 국가폭력이 있다. 바로 '농민들을 살인적으로 내몰고 있는 농업정책'이다. 살인적인 농업정책이 없었다면, 백남기농민은 아스팔트에 서있지도 않았을 테다. 그분은 땅밖에 모르는 성실한 농민이다. 


국가가 펼치는 정책, 그 하나만으로도 우린 삶이 조각난다. 이렇게 쪼개지고 부셔진 삶을 우리, 살아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지옥에서 사는 셈인가! 그래서 헬조선아니던가! 


'국가폭력' 그것은 단순히 '폭력'행위가 얼마나 무력적인가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우리들삶을 얼마나 파탄내고 있는가'를 따져 물어야된다. '국가폭력'은 물리력만이 아니라 우리들삶을 조각낼수있는 힘을 가졌기때문이다. 그래서, 그 권력이 정의롭지않다면, 우리들삶을 갈가리 빼앗아 유지하는 강도떼 일뿐이다. 


물론, 이책은 그 어떤 무거운 질문 절대로 하지않는다. 물흐르듯 그들이 겪었던 삶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그것을 엮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떠나지않는 질문이 많고, 그들의 삶이 그들만의 것이였다고 여길수 없고, 오늘도 내일도 펼쳐질 '국가폭력'이 무섭게 스쳐지나가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다. 


'간첩조작사건'의 뿌리는 상당히 깊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시대부터 시작된다. 일제점령시기 일제에 저항한 독립세력과 공산주의세력을 때려잡기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일제강점을 시시콜콜 방해하고 저항하는 세력을 막자면 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법'이 필요했고 그 법을 앞세워 합?법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항일세력들을 잡아들이고 구속하고 죽이는 일을 보장받았다. 치안유지법으로 수많은 애국자들이, 수많은 애국민중들이 잡혀갔고 고문당해야했고 죽어야 했다. 

그렇게 일제강점은 강제적으로 폭압적으로 유지할수 밖에없는 날강도떼였기때문이다.  


이 법은 일제시대가 끝날때 끝장났어야 하건만, 그 목숨줄을 연명시켜준자들이 있었다. 친일파청산, 친일역사청산을 끝까지 방해했던 세력들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법'이라고 부르기에는 정말 조악하고 '애매모호'함 그 자체임에도 (그래서 '막걸리법'이라 부르건만) 21세기에도 멀쩡히 살아있다. '치안유지'법이 저들(일제)지배를 유지법이였듯이, '국가보안'법도 '친일파와 반공주의자'들 즉, 국가권력 지배 유지법이였다. 이를 이용해 위태로운 더러운 권력자들은 회생했다. 당연히 저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은 물런이거니와 아무연고도 없는 이들도 잡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고문, 감시 조작까지 밥먹듯이 해왔다.  


얼마전 발행된 '조국과민족' 웹툰을 보면, 저들에게 '조국과 민족'은 그들자신이였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조국과 민족'도 개인의 것으로 만드는 자들이다. 그들이 자행한 폭력. 이것없이는 정권유지자체가 안되었으니 이 얼마나 모진세상을 우리가 살아낸 것일까? 

 


아니다 다를까? 간첩조작사건은 2000년대에도 있었다. 그 '간첩조작' 명줄 한번 참 길다. 

'유오성'간첩조작사건은 '간첩조작'이 얼마나 합법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우리사회를 똑똑히 들여보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진보정당 해산사건'은 국가폭력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이다. 혹여, 이건 당연한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잠시 고민해보시라! 정당은 만들어지는 것에서부터 가입, 해산까지 그 구성원의 자유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권력이 개입되면, 그 자체가 폭력이고 그 자체가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것을 용인했다. 왜 그랬을까? 그뿌리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간첩조작사건으로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우리들 몸이 우리들생각이 '간첩'(조작되었음에도) 때려 죽여도되고, 그들 삶을 산산이 부셔뜨려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회의식이 뿌리를 내렸기때문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오늘날 정권에 바른소리하고 정권과 다른소리를 하면 '종북세력'이라며 매장시켜려는 행위는 바로 이런 사회적뿌리에서부터 기생했다. 사회를 온통 비이성적이고 야만인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성적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게하고, 건강한 사회의식, 주인의식 자체를 파괴한다. 이를 통해 더럽고 파렴치한 국가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어리버리하게 불의한 현실에 순응하면서 조용히 살라고 하는  참으로 못난 사회, 무능한 사회이다.  


헌법위에 살았던 최순실과 박근혜일당들에게 '블랙리스트'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온통 저들의 권력에 지위에 도전하는 자들로만 보였을테니 말이다.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없다. 얼마나 정정당당한 내용이 없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폭력문제는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얼마전 영화 '스노든'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국의 유능한 IT기술자가 국가권력의 폭력을 폭로했다. 분명 전세계적인 테러리스트와 테러국가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만들라해서 만들었는데, 시뮬레이션(실험)을 몇번을 해봐도 오히려 '자국민의 감시'를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자국민'(미국인)으로 만들고 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폭로하기까지 결심하는데서부터 실제 실행하는데까지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고 그의 가족들의 안전도 보장받을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폭로'했다. 


여기에는 아주 많은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오바마'정권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가권력의 감시'는 극소수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민'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이것을 폭로하는 사람에게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국가권력이 휘둘러졌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만들어진 배경을 따지자면, 미국 탄생배경에서부터 미국의 '국가안보' 그 허상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어쨌거나, 들어난 사건 그 자체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쓰잘데기없는 명분을 가지고 한 '개인'에게 폭력을 퍼붓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미국도 그러하고, 우리나라도 그러하고, '국가'안보 정말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일일까? '국가'를 빙자한 '저들의 더러운 권력욕망'을 지키기 위함 아닐까? 

역사는 그리 알려주네. 수많은 국가권력희생자들은 삶으로 그리 가르쳐주네. 


그리고, 초헌법적 권력을 누리며 국정을 농단했던 박근혜일당들은 아직도 저들의 잘못을 깨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국가전복세력'이 이니 '좌파세력'이니 '종북세력'이  '탄핵'으로 나라를 흔들고 있다고 게거품 물고 계엄령까지 운운하면서 떠드는 세력을 돈까지 주면서 '동원'시키고 '앞' 세우고 있다. 


정작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나라를 뒤흔들고 뒤죽박죽 만든자들이 저들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는지. 

저들의 핏대세우는 목소리에는 저들의 권력기반이 얼마나 추한지를 보지않고, 추한권력유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갈가리 뺏았았는지는 보이지않고, 추한 권력에 기생해 살아온 자신의 윤택한 삶이 무너지는 것만이 무섭고 두려울뿐인가보다. 


남의 삶을 빼앗아 누린 삶. 그 얼마나 행복할테냐! 

남의 삶을 짓밟아 누린 권력, 그 얼마나 정당할테냐!


<폭력과 존엄사이>책,  <민족과운명>웹툰및 책,  <자백> 영화, <스노든> 영화는 하나같이 말한다.

'국가폭력'과 '인간의 존엄'을 묻는다.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권력, 그것을 용인하지말야 한다. 


어찌보면 21세기까지 우리들은 '인간의 존엄'을 빼앗기며 살아낸 삶이였다는걸 보여주는 것같다. 

여전히, 오늘날도 우린 빼앗긴 '인간의 존엄'을 되찾는일, 그것만이 '사람'이 될수있는 유일 무일한 방법아닐까? 


<폭력과 존엄사이> 책 마지막장에도 여짓껏 조작된 간첩사건들이 몇장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지. 한줄에 한사건이 써있으니깐. 그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고 고문받고 감시받은사람들 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죄가 되기까지 그들의 삶이 '감옥' 그 자체였으니, 이 죄를 어찌 용서받을꼬. 이들을 진정 위로하고 구원하는 방법은 하나뿐! 이리도 맘대로 '국가폭력'이 자행되게 하는 '법'적 장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있는한, 아무리 백만번 '진실'을 파헤친들 '간첩'은 또다른 방법으로 언제든지 만들어지고 사회적매장과 폭력을 그 누구도 언제든지 당할수 있기때문이다. 


국가폭력, 남의일 같아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이고 '우리들삶'이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한채 빼앗겨왔다는 걸 우리가 하루빨리 깨닫는다면, '국가폭력'을 막아내는일은 어찌보면 우리삶을 온전하게 지켜내기위한 간절한 생명선일지도 모른다. 우리들 삶을 망가뜨리고 부셔버리는 '국가폭력'이 무엇인지에서부터 그것을 막기위해서는 어찌해야할지까지 그 고민의 깊이가 많아 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강도떼'를 권력에서 몰아내고 빼앗긴 우리삶을 하나씩 하나씩 되찾아 누리는날 오지않을까? 



'책'과 '영화'를 통해 국가폭력을 마주하는 것도 필요하고,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면서 '국가폭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들여다보는일도 너무나 간절하다. 무엇이 되었든, 시간도 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미래도 맘대로 설계하지 못하는 이지경까지 왔는지. 우리삶이 지금 버거워도, 놓치지말고 더 똑똑하게 들여다보자. 그 용감함이 우리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힘임을 잊지말기를..간절히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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