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드라마가 끝난지 한달이 지났건만 그 여운이 길고 오래남아 2015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즈즘에도 나는 기억을 떠올려본다.
2015년 가장 훌륭한 드라마, 최고의 드라마라는 찬사가 아깝지않고 더 크게는 근래 몇해동안 보지못한 빼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임에도 그 어느 예술작품에 고스란히 그들의 고민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어디 예술작품으로서뿐이겠는가! 사람들속에서(사회현실에서) 공공연히 회자되며 뜨겁게 노동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는 문제를 풀어가야 하거늘, 이놈의 사회는 도통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을 하지않는다. 그런점에서, '송곳' 웹툰, 그것을 드라마한 '송곳' 드라마는 폐쇄적인 오늘의 현실을 뚫고 '현실'을 그리고 '우리들삶'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기에 더더욱 소중하고 그 가치가 남다르다 하겠다.
매회마다 나를 시큰하게하고 드라마 '송곳'은 오로지 '나'를 찌르는 것같아 한 회도 빠짐없이 나는 울고 말았다.
나를 울리는 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이나이쯤 되면 왠간해서는 울음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거니와 이미 메말라버려 눈물샘마저 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함에도 매회 '송곳'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들여다보게 했고, 나를 들여다 보다가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종종 화면이 보이질 않았다.
그눈물의 여운이 오래가서, 그 여운따라 글을 남겨본다.
'송곳'이 전해준 우리들의 이야기, 그 안에 숨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어찌보면 우리들 스스로를 뚫고 나가야 세상을 향해 우리목소리를 낼수 있다는 거 아닐까?
드라마 곳곳에서 던지는 대사 한마디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눠도 될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그중 꼭 잊지않고 기억했으면 하는 이야기를 담아본다.
1.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지만 모든것이 변했다.
드라마에서는 황준철이 부당하게 쫒겨나야하는 상황을 이겨내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지만, 모든것이 변했다' 나는 이 문장을 가슴시리게 받았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는데, 모든것이 변한 나를 본적이 있기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때, 현실을 똑바로 보기 시작할때 그래,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현실에서 주인다운 삶을 선택했을때 오는 감정이며, 희열이며 무엇이든 해낼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때이다. 세상은 현실은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는데, 세상과 현실을 대하는 내가 달라졌기에, 세상을 살아낼 힘도, 현실을 이겨낼 힘도 솟아나기 시작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지만, 모든것이 변한 그 순간을 우리들은 매번 만나야 한다. 그 힘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이 지옥같은 세상(악마같은 자들이 판벌린 세상)에서 벌받는일 말고는 무엇을 할수 있을까!
물론, 이 순간은 다음싸움의 험란함을 예고한다. 노예가 더이상 자신이 노예가 아니란것을 알기 시작하면 노예를 다스리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더 강도높은 압박과 부당한 처우가 날카롭게, 더 무자비하게 우리들을 엄습해 온다. 그래도 싸워야한다.
우린, 모든것이 변해보이기 시작하는 그 눈과 힘으로 꿈쩍도 안하는'아무것'을 변화시킬수 있기때문이다. 그길은 더 많이 힘이들고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무것을 변화시킬 그런 힘이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지만, 모든것이 변했다' 세상을 보는눈, 현실을 바라보는 내눈이 달려져야 한다. 지금의 노동현실은 노동법이 있어도 무용지물(고장난 신호등)이요, 개처럼 일하고 '부품'처럼 버려지는 곳이다. 여기에 순응하며 사는 자기자신을 똑바로 봐야 한다. 자기자신의 노예근성을 뚫고 나와야 비로소 '모든것이 변한' 세상을 만날수 있다.
바로 '송곳'은 우리자신을 뚫고 나와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거다. 부당한 세상에 철저하리만큼(완벽하게) 길들여져있는 우리들 자신을 뚫어야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걸 아닐까.
2.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이제 막 싸움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점에, 조합원들간의 싸움이 커지는 장면에서 '짊어질수있는 만큼만 짊어지고 가라'고 말한다. 그렇다. 억지로는 할수 없는일이다. 우리, 지금까지 억지로 떠밀려오듯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내문제를 내가 알고 내가 나서서 싸우는 일에, 그 누굴 떠밀어 할수 있단말인가! 자신이 원해서 시작했고, 자신이 원해서 떠나는 거다. 하지만, 우리 잊지말아야 한다. 끝까지 싸우는 이들도 흔들리는 우리처럼 똑같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을 존경해주고 그들을 잊지않고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사정을, 여건을 조금이라도 빨리 고칠수 있게 다듬어야 한다.
끝까지 싸우는 사람들 또한, 흔들리는 사람들을 보며 떠나는 사람을 보며 쓸데없이 노여워하지 마시라. 그들은 흔들리고 이기적인 또다른 '나'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않은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애끓는 마음으로 그들의 여건을 가슴아파하며, 언젠가는 함께 해주리라 믿어주자! 이것이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나만 손해보는 것 같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사람들이 어떨때는 부럽기까지하고, 나도 사정이 나은것 같지않은데. 싸움의 그 끝은 보이지않고 사측의 만행과 횡포는 겉잡을수 없이 커져만가는데 곁에있는 사람은 없고, 이길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하늘을 찌르고, 아니 버틸수 있을까하는 순간까지 오는데.. 사측의 탄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가!
그 순간, 그누가 '인간'에대한 믿음으로 최전선을 지킬수 있단말인가! 정말 힘든일이다. 그래서, 최선두에 혼자서라도 싸우는 그들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닥에 다 들어내고 힘겹게 자신과 피터지게 싸우고 있기때문이다.
'인간에게 실망하지않는다'는 이말만큼 우리에게 절박한 말은 없다.
가난하고 힘없는 우리가 가진 힘이라곤 '단결'밖에 없기때문이다. 사측은 흩어지길원하고 뿔뿔이 조각나길 바라지만, 우린 그들이 흐트려놔도 (그들의 달달한 유혹에 넘어가도) 다시 하나로 뭉쳐야만 힘이 된다는걸 우리스스로가 너무나 잘 안다.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겁한 우리자신에게 실망하지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흔들리는 자신과 끝까지 싸워 우리, 끝까지 버티고 있는 그 한사람 (드라마에서는 '송곳'같은사람)과 힘을 합치자.
어찌보면, 드라마 송곳은 흔들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송곳같은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흔들리고 비겁하고 도망치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비겁함뒤에 숨지말고 그것도 인간이니깐 할수있는 고민이니 무너지지말고 지금도 최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송곳' 그 곁에 조금씩 다가가길 바라는 거 아닐까.
3.시시한 약자 우리들을 위한 싸움
'시시한 약자' 이말이 왜이리 위로가 되는걸까? 나약한 나를 위한 말일까? 흔들리는 나를 위한 말일까?
그래, 흔들리고 비겁한 순간이 아예 없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사람은 그누도 없을테다.
그만큼 자신을 선하게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시한 약자'라는 표현은 흔들리는 우리들을 향한 애끓는 표현이리라.
또한, 그래서 시시한 약자인 우리들이 '서로를 감싸고 보듬고 더 강력하게 단결해야 한다'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시시하기 짝이없는 존재들이다. 그 시시함을 인정하고 단결하면 우리 더 강해진다는 걸 알려주는듯 하다.
우리자신의 시시한 모습에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하는말 같다. 인간인지라 그러하기 힘들지만, 그래 인정하고 서로 보듬고 다독이며 시시한 강자와 잘 싸워보자는 말같다. 시시한 우리가 더 성장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말이 아닐까?
4. 노동자는 하나가 될수 있을까?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그 자체가 꿈이고, 이상이며,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종착역인지도 모른다.
노동자의 집회에서 언제나 보이는 구호이고 언제나 함께 떼창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뜻을 제대로 아는이가 없는듯 하다. '노동자는 하나다'는 노동자끼리 차별이 없는 것이다. 노동자끼리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구호같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간절한 구호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하나되는날. 그날이 해방의 그날, 지옥같은 오늘을 구원해줄 그날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려운일이고, 어려운일인만큼 꼭 해내야하는 일이고, 또 언젠가는 이루어지고말 일이리라.
지금 우리가 그렇게 못한다고 해서, 가슴에 새기지 말아야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영혼없는 구호라면 차라리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고, 대기업노동자와 중소기업노동자로 나뉘고 본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가 나뉘고 연봉의 크기로 노동자를 나누고, 직업을 귀천을 두고 노동자를 나누고... 이렇게노동자를 쪼개고 쪼개 산산히 부셔트려놓는다. 우리들 스스로도 산산히 조각조각 내어 우리들 자신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일하는 사람들 가슴속에, 심장속에 살아 뛰었으면 한다.
지금처럼 산산히 쪼개진 우리들을 꿰매기에는 턱없는 말일지 모르지만, 다시 손잡을수있는 소중한 '동아줄'이기도 하다.
백만번, 천만번 되내어보면서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자끼리 차별이 없는, 일하는 만큼 사람의 품위를 지킬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보장해주는 일'. 그건 같이 싸워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
노동으로 삶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노동자'다. 그들모두가 '하나다'라는 공감과 연대로 노동자를 산산히 쪼개서만이 사회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맞서 당당하게 노동자의 목소리을 내고,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고 되찾아와야 한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했듯이. 우린 벌받으려고 이세상에 온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열심히 노동했고 그 노동에 대한 임금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인처럼 대접받을일도 없으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을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노동자는 하나다' 이것 또한 강요할수 없는일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하는 , 스스로 깨우쳐 채워져야만 가질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시한 약자인 우리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 꽉막힌 지옥같은 세상을 바꿀수 있겠는가!
5. 마치며
드라마 '송곳'은 우리사회의 절대 다수인 '노동자'그들의 삶은 온전하게 꺼내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물론, 최규석작가의 웹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이자리를 빌어 '최규석' 작가에게 감사를 전한다.
단순히 '까르프'노동자만이 아니라 버스노동자, 제조업노동자, 청소노동자의 이야기까지 담아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폭넓게 담았다. 또한, 법적으로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분위기로는 무섭고 두려움의 영역인 '노동조합' 건설과정과 그로인해 벌어지는 싸움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일하는사람들의 '권리'의 영역임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수많은 명대사들이 많았지만, 이 드라마가 돋보이는 건 오히려 하나다. '적나라하다'는 거다.
흔들리는 우리를 마주하는 일도, 시시한 강자들의 야비하고 째째한 술수들도.
시시한 약자들인 우리가 싸워가는 그삶을 고스란히 담았기에 드라마 '송곳'은 더 가슴이 뜨거워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더 많이 우리들의 삶을 담은 작품이 나와야 한다. 현실을 담은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바로 위로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싸우며 울고불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우리들. 힘내자.
덧,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법개악은 이러하다.
이것이 통과된다면 앞으로 우리앞에 펼쳐지는 지옥은 이전 것과는 비교할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잘 버텨낼수 있을까.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수 있는건 단 하나. 싸우는 것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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