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시간>이영화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릴만큼 그 구성이 상당히 단조롭다
그 단조로움속에 너무나 강렬하게 품어나오는 사람들의 감정들이 가이 폭발적이다.
단조로운 영상은 마치 다큐처럼 한사람씩 만나는 똑같은 영상을 계속 보여준다.
그런데, 그 만남에는 아주 미묘하면서도 폭발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이야기들이 담겨져있다.
그래서 이영화를 마주한 사람들의 평가를 일반화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분노'라는 것을 삼키며 보았고, 보고난후에는 남겨진 그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라는 상상으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이 영화는 영상으로 보여주는 역동성이나 영상미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람의 관계로부터 발산하는 뜨거운 감정표현 그것으로 촛점을 맞추었기때문에 사람의 표정과 대화를 집중적으로 보지않으면 이 영화의 가장 중핵적인 내용을 그 어느것 하나 알아차릴수없다. 사람의 가치, 그 중요성에 대해 가장 심도깊게 다룬 영화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단조로운 영상에 비해, 영상 하나 하나가 던져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묵직하고 뜨겁다.
일하는 사람이 어느날 해고되었고, 해고는 동료들의 투표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 투표는 산드라의 해고냐, 1000유로의 보너스냐를 결정한 투표였다. 그 투표결과를 전화로 전해들은 '산드라'가 다시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투표가 공정하지 못하게 진행되었다며 다시 재투표를 하자는 전화였다. '산드라'는 일하지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기때문에 '동료들의 1000유로'를 빼앗고 싶지는 않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하는 자신을 이야기하기위해 동료들을 투표에서 자신을 선택해달라며 만나러 나선다.
그리고 동료들을 한명씩 만나간다. 그 만남에는 동료들에게도 절박한 1000유로를 포기해달라고 이야기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것을 목도하기도하고, 동료의 해고와 맞바꾼 1000유로 보너스를 받은 미안함, 1000유로가 없으면 안되는 이유 등등의 대화들이 오고간다. 이 과정에서 '산드라'는 주체할수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동료들의 절박한 1000유로보너스를 빼앗아가며 나의 일자리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비참한 자신을 감당할 길이 없어진다. 급기야는 먹고있는 '안정제'를 1통을 다 먹어버린다. 한통을 입에 넣고 물을 삼키고 모든것을 포기하고 자려는 그녀에게 온 동료,그동료는 자신이 미안했다며 '산드라'를 택하겠다며 그것을 전하려 집에 찾아온다. 산드라는 응급실에 실려간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나는 그랬다.
이 어찌 '노동자의 해고'를 잔인하게, 보너스로 맞바꾸는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만든 그놈의 사장을 정말 때려주고 싶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폭거인가?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그 사장놈의 행태에 나는 영화가 중반부로 치닫기 시작하면서는 머리끝까지 난 화가 가시질 않았다. 왜? 부당한 해고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보너스를 대신 준다고 하며, 그것을 구걸하면서 자신을 택해달라고 요구하게 만드는가? 자본가들의 잔인함은 왜이리 도를 지나치고 있는겐지.. 잔잔한 영상에서 뿜어져나오는 '나의 분노'는 이 영화를 보는내내 가슴한편을 멍들게 치고 있었다.
평온한 영상을 보며 '극도로 잔인한 자본가의 속성'을 보자니 피가 정말 거꾸로 솟아 머리끝까지 그 분노를 삼킬길이 없었다.
해고 전화와 재투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시작한 금요일 , 그리고 주말내내 동료를 만난다 드디어 월요일 투표를 하고, 투표에서 과반수이상이 되지않아 결국은 해고된다. 그러자,사장은 다시 불러 이만큼 동료를 설득했으니 '계약직'을 주겠다고 한다.
재계약을 해야할 계약노동자가 있으니 그와 재개약을 안하고 '산드라'에게 대신 그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 사장놈의 멱살을 콱 잡지않은 것이 정말..한스럽다. 우야튼, 산드라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동료와 자신의 일자라를 맞바꾸지 않겠다고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나 잘싸웠다고, 행복하다고 그리고 끝을 맺는다.
산드라의 표정에 주목하면, 산드라는 내내 우울하다. 1000유로를 포기하겠다는 동료를 만나면 웃고, 그것을 포기하지못하겠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동료를 만나면서는 거의 미칠지경에 이른다. 그들의 1000유로의 쓰임새를 알기때문에..구걸하면서 내가 일해야 하는건지, 물론 나는 절박하게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지만, 그렇게 일해야 하는건지. 아니 살아야하는건지..이렇게....그런 질문을 내내 하는듯했다. 그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야했다.
설령, 동료가 자신을 택하지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탓하려고 하지않았다. 동료들을 한사람씩 만나가면서 그녀가 조금씩 웃음을 보인다. 마지막에는 이쁜 보조개까지 보이며 하얀이를 들어내며 웃는다. 그 우울한 얼굴, 삶을 포기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담겨진다. 삶을 포기하려했던 그녀의 순간 순간 조금씩 삶의 희망으로 담아져 가는 표정, 그 사소하면서 크나큰 차이를 나는 보았다. '산드라'는 인간 그 밑바닥에 까지 가는 절망과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 용기에 대한 표현을 표정으로 섬세하고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잔인한 자본가의 횡포, 농락을 처절하게 보았다.
영화에서는 그어떤 분노도 사장에게 향하지는 않았다. 아주 단조로운 대화뿐이기 때문에 그안에서 분노를 읽을수는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보는 내내 나는, 자본가가 만든 잔인한 농락,횡포에 분노가 서려 나의눈이 씨뻘게 지는걸 느꼈다.
만약에, 당신에게 '동료와 일하겠는가? 아니면 1000유로(우리나라돈으로 133만원가량한다.)보너스를 택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것인가? 영화를 본사람 대부분은 그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질문이 완전 틀렸다고 생각한다.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한다.
'동료의 해고와 1000유로 보너스,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사장을 용납할 것인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투표자체를 거부하라! 그렇지않으면 사장에게 우리삶을 농락당하고, 사람의 가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지나치도록 잔잔하고 단조로움속에서도 강렬하게 뿜어내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오늘을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감히 권한다.
일터에서의 부당한 대우, 처우에 혼자 울고 자신탓이라며 삶을 비관하지말고 뜨겁게 동료를 만나라 라고 말이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그 안에서 지혜와 답을 찾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이영화가 주는 간절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당하게 해고당한 사람에게 내일을 위한 시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공감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노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죽음의 문턱까지 가려고 했던 우울 그자체인 '산드라'가 마지막에 '행복하다'고 환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었던건, 삶의가치, 사람의 가치가 그 얼마나 고귀한가를 스스로가 동료들을 만나며 깨우쳤기 때문아닐까?
덧, 사진은 daum영화섹션에서 가져왔다.
이 영화는 1월1일 개봉했다. 감독:다르덴 형제, 주연: 마리옹 꼬띠앙
감독은 " 지난 10년간의 경제위기 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다른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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