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방송>이 <먹는방송>과 더불어 주요 유행이 되고 있다. 이런유행은 어떤이들은 그만큼 먹는것에 대한관심이 많아지고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먹는것이 주는 기쁨, 열망이 우리들사회에서 차리하는 위치가 높아지고 있다는 건데, 그건 또다른말로 세상살이가 각팍하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어디론가 도망치지않고서는 숨조차 쉬기 힘든 우리들의 버거운삶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는건 아닐까싶다.
'먹는방송'은 넓게보면, 그 어디 미디어방송에도 빠지지않고 죄다 하는 것이다. 그건, 먹는것(행위) 그 자체가 사람이면 안하고 살수 없는 문제이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먹는행위) 방송한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방송이 점점 영역을 넓혀지고 편성대가 많아지는건, 그만큼 방송미디어 자체에서도 문제지만, 그것에 열광하는 수많은 우리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큰문제이다. 그만큼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싶은 현실앞에 '동물적감각과 쾌락'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있는 현실'이 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의 지옥같은 현실을 더 잘 버티게(견디게) 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맞다. 숨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숨통'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부당한 지옥을 그대로 인정하고 견디며 살아가게 하는 '마약'이라면 어쩔건가?(물론 먹방만 마약이 아니다. 뇌를 죽이고 사색을 멈추게하는 것, 현실을 마주하게 하지않는것, 그 모든것이 해당된다)
지금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세계는 바뀌어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이지, 묵묵히 견디어내는일이 아니다.
지옥을 만든자들은 그들자신만을 위해 수많은사람들을 지옥에 쳐넣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을 살아내는 자들이 반항과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순응하며)견디며 살아내길 바란다. 무통증 무감각으로 이 지옥을 살아내길 바란다. 지독히도 잔인한 고통이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삶 하나하나가 바늘조각같이 부셔지며 쑤셔대는데 그 누구도 아프지않다면, 그 지옥은 영원할테다.
모두가 공포스런 삶을 살아내고 있고 하루하루살아내기 그 자체가 고통이고 저주스럽다.
그래도 우린, 마주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해야하고, 그 고통을 주는자들을 찾아야 한다. 참고 견디라고 떠드는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지옥을 견디게 하는 '마약'과도 싸워야 한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주는 원인을 찾아내고 그 고통자체를 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방송'뿐만아니라 방송미디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론매체들을 접할때, 지옥에서 꼼짝말고 잘? 살아내(버티고 견디)라고 던지는 '마약'인지 아닌지를, 그 '마약'에 내가 쑤욱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먹은것으로 되기까지 사람의 손길, 노동을 보여줘야
<먹는방송>이 제대로 되려면, 음식이 어떻게 우리앞에 왔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음식의 기초인 식재료가 어떻게 성장하여 오는지, 먹기수월한 상태로 만드는 노동은 얼마인지 즉, 음식(먹는것)으로 되기까지 사람의 손길, 공정, 노동을 보여줘야 제대로된 <먹는방송>이다. 사람의 손길, 공정, 노동이 들어있는 것이 음식이기에, 그 결과물을 초감각적으로만 먹는데만 집중해 보여준는다는 건 어찌보면 기만 그 자체이다. 음식은 초감각적기능만으로 만들어지지않기 때문이다.
이런관점에서 <요리방송>도 마찬가지로 봐야하고, '만들어먹는다'는 행위만을 쫒아가서는 안된다.
또한, 만들어먹는 <요리방송>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건, '만들어먹을수 없는' 우리들 처지가 반영된 것이기때문에, '만들어먹을수'있는 여건을 보장해달라고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열망으로 번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들도 하나씩 담아내면서도, 근본적인 <만들어 먹는다>는 것에 대한 자기정의가 필요하다.
<요리방송>이 단순히 보는방송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따라하는 것'에도 미치고있기때문이다. (물론, 모든방송 미디어는 '따라하는것'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것도 그러하지만, 음식은 유행이 아니라 '삶'이다. 따라하기가 아니라 우리삶 그 바탕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남따라하기'가 자기삶일수 없듯이, '따라하기' 그 자체가 삶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런차원에서, 음식 즉,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자기삶에 무슨 의미인지를 자기머리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내(자기)손으로 만들어 먹을줄 아는 건, 삶의 기본이요, 삶의 기초이다.
몇해전부터 <요리방송>이 뜨면서 남자도 이젠 요리를 할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남성에게도 요리배우기를 강조한다. 마치, 요리가 여성의 전유물이였다가 빼앗은 것처럼, 혹은 가뜩이나 살기도 벅찬데 '요리'까지 해내야 한다느니 하면서.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만들어먹는다'는 행위는 일생 해야 하는일이다. 죽는날까지 먹어야만 살수 있기때문이다.
마치, 먹는것이 넘쳐나서 안먹어도 그만, 사다먹으면 그만, 그것도 아니면 식당가면 그만이라 여기는 풍토에, 새삼스러운 답일테다. 하지만, 먹는건 오로지 '사람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오늘날처럼 '돈'이면 뭐든 다되는 세상에서 '내돈'주고 사먹는 행위라 여기기에, 그 노동을 철저하게 숨겨버렸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 '노동'이 안받침되야, 먹는것은 우리앞에 온다. 그리고 그 도움으로 우린 삶을 빚는다.
일생을 먹어야만 살수있는 데, 일생에 단 한번도 제손으로 밥(먹는것)을 해먹지 못했다는 건, 불쌍한 삶 가련한 삶 그 자체이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만들어먹는다'는 의미는 삶의 기초요, 기본라는걸 이해하게 된다.
내가 하지않는다면, 그 누군가의 노동으로 음식은 만들어져 내앞에 오게 되어있다. (노동없이 음식은 만들어지지않기때문) '자기노동'으로 만들어먹는 다는것, 삶의 한부분이라 여겨야 한다. 이것이 여성이 해야하느니, 남성이 해야하는니 하는 논쟁은 사실 우스운 논쟁이다. 또, 여유(시간과 돈)가 있는 사람이 하느냐 마느니 하는것도 본질을 벗어난 이야기이다.
제손으로 만들어 먹는다는건, 자기머리로 세상을 읽고 보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현재의 <요리방송>은 이것과는 완전하게 동떨어져 있다. 현란한 기술이 난무하고, 근본도 모르는 식재료로 유혹하고 초감각적인 '맛만 감탄하는 요리방송에서 얻어질 것이 아니다. 당연히, 전문가(요리사, 요리연구가 등등)가 하는 것인데, 그 음식을 내삶의 그 어느 언저리에 안착시킬수 있단말인가!
이렇다보니 소위 '집밥'이 또 유행이되어 집에서 해먹을수 있는 요리를 강조한다. 집에서 해먹을수 있는 요리이기는 하나, 내삶이 되는 그 어느 자리에 내어줄지는 모르겠다. 집에서 해먹을수 있다고 내삶의 집밥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기때문이다.
<만들어먹는다>는 것을 삶이라 여기면, 유행이 그다지 쓸모가 없다. 잠시 떠도는 것일뿐. 내삶이 되지않기때문이다.
내삶이 되자면,그만큼의 나의 노동이, 내품이 들어가야하고, 내삶에 스며들어가야 하기때문이다.
관점을 잃은 현란한 <요리방송>에 만들어 먹을수 없는 자기 처지를 한탄하거나, 만들어먹고픈 (간절함)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만들어먹는다>는 의미가 내삶에서 무엇인지를 생각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동안 '만들어먹는다'는 그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차근히 채워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노동(사람의손길)'을 들여다봐야 한다.
<요리방송>은 요리하는것만 방송한다. 불앞에서, 또는 조리대앞에서 왔다갔다 들썩들썩 뚝딱하며 만들어내는 것만을 방송한다. 이것이 요리방송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민은 이보다 더 넓어야 한다.
<먹는방송>에서는 그 먹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봐야한다고 했다. <요리방송>에서는 어떤 노등이 스몄는지를 봐야한다. (물론, 먹는방송도 어떤노동이 스몄는지 봐야하며, 요리방송도 식재료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봐야한다.)
음식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불앞에서 노동만을 이야기할순 없는 까닭이다.
식재료가 어떤 노동을 거쳐 요리재로로 사용하지는지도 알아야하고, 그 요리재료를 손질하고 다듬는 과정, 그것을 먹을수있게 만드는 과정, 그리고 요리하는동안 사용된 제반 조리도구 등등의 청소, 정리, 먹고난후 설겆이, 정돈까지가 사실은 음식을 만드는다는 모든 공정이다. 이 모든 공정이 바로 '요리'인 것이다. 어느 한부분만 보여지거나 강조하는건 기만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의 <요리방송>은 기만적이다. 음식을 만드는 전반의 공정이 하나라도 빠지면, 음식만들기는 사실 불가능한데, 방송에서는 '뚝딱!' 만들어지니 말이다. 물론, 방송상 '생략'한것일테다. 하지만 삶이라 했을땐 '생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다 거쳐야 한다. 그것이 삶일테니깐.
여러가지 '먹는방송' '요리방송'이 있지만,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삼시세끼>다 물론, 애초에 의도했던 '유기농라이프'라는 기조가 잘 반영되지않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찌되었든 최소 '음식만들기'공정과 노동이 자연스럽게 담아졌기때문이다. 여기에, 키워내는 여정까지도 담기도 했었으니 (여러농작물재배) '음식'이 어떻게 우리앞에 오는지, '노동'을 통해 오는 소중한 것이라는 담론까지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서 배울것은 '노동의 분담'이다. 혼자먹을것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함께)먹을 것을 만든다고 할때는 함께 분담해 노동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일방적으로 그 누구에게 전담하는 식의 노동이 아니라 함께 먹는만큼 함께 분담해서 노동해 먹는 문화가 절실하다. 이것 또한 '만들어먹는다'는 것이 어떤의미인지를 삶으로 체득하지않으면, 그 누가 해주는 , 그누가 차려줘야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또는 그 누가 차려내야하는, 그 누가 만들어줘야하는 것으로 단정짓는다.
음식을 만드는 공정을 알아야하는 이유는 이것때문이다. 어떻게 음식이 만들어지는가를 알기때문에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만, 음식을 만들때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수 있다. 그 누구(전담한)의 노동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동해서 함께 먹고 함께 치우는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야 하기때문이다.
고로, 음식은 삶이다. 음식을 만드는 공정은 삶을 빚는일과 같다. 내삶의 각각의 수많은 재료들을 내가 선택해 하나씩 하나씩 다듬고 손질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맛으로 음식(삶)으로 만들어내고 그 여정동안 사용한 것들을 하나씩 씻고 정돈하면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아닐까.
물론, 우리에게는 삶에 대한 '선택'이라는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않다. 삶을 내멋대로, 내의지대로 꾸려나가고 빚을수 있게하질 않고있다. 그렇다고 포기할순없다. 단 한번뿐인 생인데, 단 한번뿐인 삶인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삶을 빚는데 아까워하지말아야 한다.
오늘날 편의점도시락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건, 만들어먹을수있는 여건자체를 보장하지않는 우리들의 팍팍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요리방송'에서 우리가 정작 배우고 원해야 하는건, '만드는 노동'에대한 소중함이고, '만들어 먹을수있는 삶의 여건을 보장'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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