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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로> 찾기/오늘을 노래하다

<터널>속에 존재했으나 감쪽 같이 사라져버린 그 한사람은 바로 우리 아니였을까?




<터널> 이 영화를 본지가 보름가까이가 넘었건만, 영화를 볼때 멈추었던 시간에서 아직도 나는 헤매고 있다. 

많은이들은 이영화가 세월호를 비롯한 재난사고에 대처하는 우리사회, 우리들모습을 담은것이라며 이야기한다. 또, 터널에 갇힌 건, 바로 우리들자신이며, 우리사회가 아닌가를 묻게했다고 평하는 것같다. 

여기에는 다른의견이 없다. 우린, 이사회를 살아내면서 수많은 재난을 목격했고, 그 재난앞에 얼마나 초라한성적표를 가지고 수습하고 대처했는지 알기때문이다. 그래서, 한장면 한장면 펼쳐질때마다 너무 현실적이여서 영화를 감상한다기보다는 우리들삶을 또렷이 보여준듯해서 영화를 보는동안 차디찬 터널에 스스로가 갇혀지는것을 느끼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건, 영화가 보여준 우리들의 재난을 대처하는 모습은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반복되리라는 현실적인 무서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는 이런 보편적인 감상평과 다르게 이 영화 어느 한장면에서부터 멈춰버렸다. 그리고 영화상영 내내 그 장면때문에 제대로 봤는지도 가늠하기가 힘이들었다. 바로, '미나'(남지현)의 등장에서 부터였다. 


터널안에 다른사람이 존재했고 살아있었다. 오로지 '정수'(하정우)하고만 소통했고(물론,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있었다.) '사회' (밖)와는 소통하지 못한, 즉 존재했고 그 안에서 죽었으나 그 누구도 슬퍼하지않고 애도하지않은 단 한사람이였다. 

그뿐아니라, 미나는 죽을만큼 잔인한 고통에 처해있었고 곧 죽을만큼 상태였지만 지독하리만큼 극도의 '미안함'과 '죄송함'을 시작으로 말을 시작했다. 아마, 여기서부터 나는 영화감상을 멈춰버렸다.

 


재난이 자신의 몸을 덥쳐 꼼짝 달싹할수도 없거니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고통 그 자체가 '죽음'에 이르게 할정도로 무거웠건만 왜? 미나는 '미안함'과 '죄송함'으로 말문을 열어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해야 했을까?  

그러면서 떠올렸다. 지옥에 살고있는 우리들같아서 한편으로는 목이 매여 울음이 왈칵하고 쏟아지다가도 뭣이 그리 미안하고 죄송한것이냐 하는 '화'까지 치밀기도 했었다. 


지옥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얼마나 다를까싶어 눈물이 나면서도 지옥에 사는 것이 우리잘못, 내잘못이 아님에도 자기잘못인양 세상과 사회에 미안해하고 죄송해하는 그 애처로움까지 가 닿으니 미치도록 아프고 머리끝까지 화도 치민다. 


거기다가, 죽었으나 그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신을 찾아야한다는 요구조차 없었다. (물론,영화흐름상, 영화상 담지못했으리라. 영화를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진짜 우리들과 같구나.. 분명 '살아있었고 그 안에서 죽었지만 그 누구도 애달파하지않는 존재, 사회적 고통만 받다가 지질이도 미안해하다 사라지는 존재'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인것 같아 영화내내 그 먹먹함에 빠져있었다. 


이뿐아니다. 피해가족에게 보여주는 잔인함은 가히 '지옥'의 무게보다 더 잔혹하다. 

이미, 우리는 보았기에 새삼스러울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를 비롯한 수많은 재난을 당한 피해가족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던가! 그 잔인함은 영화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지막방송'이라며 라디오방송을 하게하는. 그 (방송)내용보다 그 자체(방송을 하게하는)가 나는 정말 미치도록 마주하고 싶지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사회가 가하는 피해가족에 대한 잔인함을 기억해야 했다. 



사회적 피해자, 피해가족에게 우리사회는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 사회적'재난'이 애초부터 없어야 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건 재난(사회적피해) 당한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사회의 비겁하고 저주스런 태도가 더 공포스럽다. 


사회적재난의 범주는 상당히 넓다. 우린, 일터에서 부터 일상에 이르기까지 죽음공포에 떨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이 어디 개인하나가 잘못해서 벌어지는 재난이던가! 그 수많은 재난들을 생기지않게 애초부터 단단하게 짜임새있게 일터와 일상 삶터를 만들어내기위해 우린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함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오늘도 내일도 마주하는 아니, 마주할수밖에 없는 우리들 현실에서 우리사회가 감당해야할 것들에 대해 더이상 미안해하지않으면서 더 당당하게 더 당차게 '요구해야 한다. 


재난당한 터널에서 '살아있다가 극도로 미안해하며 죽어간' 그 한사람,

'분명 재난을 당해 죽었건만 아무도 기억해내지않는 그 한사람'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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