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배반 >이 책은 언어학자와 정치학자가 권력에 중독된 언어를 하나씩 들춰보면서 그 언어들이 단순히 권력자들의 사용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들의 언어로 정착되어가는 측면 또한 하나씩 짚어본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권력에 중독된 언어가 기만적인가를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 언어들을 무의식중에 퍼트리고 사용하는건 우리자신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니 씁쓸함이 더 많아졌다.
결국 '언어의 배반이란 일차적으로는 존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언어적 왜곡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존재를 자의적으로 규정한 인식적 오류와 일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언어가 틀린것이 아니라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정사회, 좌빨,국가, 시장, 여론,국격,하나님의 뜻, 양비론과 양시론, 평화, 욕, 정치,긍정성,보란듯이, 경험,성실, 평범, 확신, 가족, 후원, 순수,진정성, 착함 등등의 언어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본연의 뜻과는 정반대로 치닫는 언어라는 걸 생각하게 해주었다.
어찌보면, 우리사회에서 강조되는 언어일수록 그언어 본연의 뜻에 가장 배반적인 내용일거라는 이야기인듯 싶다.
사실, 나는 음식에 관한 글들(언어)에 대해서 '언어의 배반'을 더 많이 느낀다.
'건강'이라는 말이 담긴 요리나 음식, 가공식품들을 마주하면 '건강'만 뺀 음식이라는 생각이 더 절절하게 드니깐.
'영양과 효능'을 강조하는 식품이나 식재료, 음식도 마찬가지다. 너무 흔하게 사용하는 지라 '건강' 본연의 의미도, '효능과 영양'의 본연의 의미도 이제는 완전하게 상실한듯 싶다. 그만큼 건강치않은 음식문화가 만연했기때문이며, 그만큼 '효능과 영양'따위와는 무관한 식문화가 자리잡았기때문이리라.
그래서, '건강'한 음식이 정작 무엇인지를 더 따지고 사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키워지는가를 볼줄 모르면, 그 어떤 식재료도 건강하다 자신할수 없는 것이다. 효능과 영양도 마찬가지다. 식재료를 화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한들 그것이 사람의 몸에 이로우려면 어떻게 키워졌는가를 봐야한다. 그것없이 '건강'할것이다. '효능과 영양'이 있으니 몸에 이로울것이라 판단하는건 오히려 독이 든 식재료를 호도할 가능성이 100%이다.
이처럼, 우리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들. 그 본연의뜻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본연의 뜻으로 사용되기위해서는 그 어느때보다 '사색'이 필요하다. '사색'이 없는 언어사용은 어찌보면 우리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되는 것 아닐까.
불현듯 그 뜻과 무관하게 사용하는 우리들의 언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세상이, 삶이 다시 보일지도 모른다.
혼탁해진 언어를 바로 읽고 바로 사용하는 것.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을 맑게하는 일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가꾸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책은 그런 이야기를 담은것 같다.
<무한미디어> 이책은 사실 내용이 상당하다. 단순히 미디어 그 자체만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필요로하는 사회에 대해 여러측면에서 분석했다. 거기다가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잘 번역해서 글을 읽는데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실, 번역서적은 잘 못 번역하면 그 낯설은 문장때문에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때가 많은데, 이책은 정말 번역이 잘되었다.
저자' 토드 기틀린'의 생각자체를 그대로 담아내려 꽤나 사색하고 쓴 번역서라는 걸 알게된다. 진짜 잘 번역했다.
이책은 2006년도에 나온 책. 즉 10년전 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읽어도 너무나 좋은 책이다.
읽으면서 우리사회에 대한 고민도, 나의 삶에 대한 고민도 정말 많이하게 해주었다.
미디어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우리들. 그 미디어 없이 삶을 엮어내질 못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 미디어가 가진 본질에서부터 미디어를 이용하는 사회, 그 사회에 길들여진 우리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지까지.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어렵지않은 글로 사색과 깊이가 담겨있다.
기억에 남겨두고자 몇가지 글을 옮겨 담아본다.
뉴스는 세계의 '거울'이 아니다. 뉴스는 현실과 우리의 생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며, 사상과 이념의 꾸러미를 만들어내는 산업적 생산물이며, 가끔은 사회변화를 이끌기도 하지만 대개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안정을 제공하는 그무엇이다.
뉴스는 지각을 왜곡한다. 세계가 이런것이라면 미디어는 세계가 저런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지.
뉴스와는 또다른 현실의 상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연예사업이다.
시간을 소비한다는 표현자체는 늘시간의 결핍이 우리삶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을 암시한다. 우리가 믿거나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않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선택함으로써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어떤면에서 이미지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수있다.
…우리가 가상 현실에 기대는 것은 단지 주의를 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스크린속으로 걸어들어가 이미지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강렬한 몰입이다.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더 강렬하고 더 완전하고, 더 특별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지가 우리삶을 고양시키고 더 밀도있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들의 삶을 빨아들이는..
…실제 사실적인 드라마에서 보았던 삶의 단편들은 이제 미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습관이 되고 내면의 리듬이 된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미디어를 시청하고 즐길 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미디어속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 재산, 명성이나 권력을 가질 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할 권리는 있다.
… 기계적인 삶의 방식에서 자라난 수백만의 사람은 기계적 수단으로 기계적 삶의 긴장을 누그러 뜨리는 수많은 방법을 고안해냈다. 미디어의 흐름은 이들의 참여의 산물이다.
…개인들은 장식품과 꾸며진 표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안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점이 공통점이다.
…인쇄물은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긴 안식처였다.
…수요는 부분적으로 가격에 의해 결정되지만, 가격은 기술적 가능성과 잠재적 소비자들의 이용가능한 총시간뿐만 아니라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문화를 선택하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우리부족이 사는 방식이다.
'이미지 여행은 혁명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행이다' - 지그프리트 카라카우어
' 그럼에도 우리의 불행을 위로하는 유일한 것은 오락물이며 이런사실이 가장 큰 불행이다' -파스칼
오락은 습관적인것이다. 우리는 자극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아마도 바보처럼 '추구의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정보사회에 살고 있지만 정보가 더이상 유용하지않은 '감정과 감각의 사회'에 살고 있다.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힘은 '권력과 감정의 리듬' - 게오르크 지멜
개인의 삶에서나 인간의 행위와 제도에 있어서 욕망은 시간순으로 논리적으로 합리성에 우선한다.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고 절대 만족하지않으며 항상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에 있어 사랑은 진실한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의 인식능력은 감정이라는 기반위에 놓여있다. 어린시절의 감정적연결의 경험은 모든사회관계가 욕망, 만족, 좌절, 애착, 적개심이 혼합된 감정적 관계로서 지속되고 발전하는 밑거름이 된다.
…화폐는 가치들을 '같은 수준에 놓음으로써 '가장 격이 떨어지는 가치와 가장 고귀한 가치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그러므로 화폐는 냉소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다.
더많은 돈이 이윤이라는 유일한 목적에 몰릴수록, 더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신념,재능과 선의, 영혼의 아름다움과 구원을 돈으로 바꿀수있다는것을 발견하게되며 이런 더 고귀한 가치들이 식료품점의 상품처럼 '시장가격'에 의해 판매될수있다는 천박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더욱 확대된다.
… 극단적으로 무감동한 사람은 '가치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전부 잃어버려 모든것을 흥분할 일이 전혀없고 똑같고 시시한 것으로 느낀다.
…계산하는 개인주의의 지배하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인정을 받기위해 역할에 맞는 가면을 써야했고, 역할대로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가면의 역할은 복잡한 내면의 욕구에서 비롯딜 것이 아니었다. 가면들은 얼굴과 완전히 융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결과 우리는 더 복잡한 내면을 갖게됐다.
…거들먹거리고 안달하는 대도시의 일상위에서 서성거릴수밖에 없는 진정한 인간은 '느끼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사람이 인간다워지는 방법이다.
… 계산의 시대인 근대는 감정에 헌신하는 문화를 만들어낸다. 자기표현을 스스로 해야하는 근대인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표현할것인자를 가르쳐주는 지침을 점점 더 필요로 하게된다.
' 민주적인 국가는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보다 삶을 쉽게 하는 기술을 선호한다'- 토크빌
…현대사회어세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자신이 말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상품의 거대한 스펙터클에 '압도당해서 길을 잃고 헤맬것'이다. -지멜-
…현대성은 끝없는 권태를 생산한다.
" 현대적 삶의 소란스러움과 흥분속에서 생겨난 '희미한 흥분과 모호한 동경', '숨겨진 불안정함', '참을수없는 절박함'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자극과 외적인 구매행위를 추구하도록 한다"- 지멜-
심지어 가정에서도 집을 잃은 영혼은 지속적인 재충전을 필요로해서 가지고 놀거나 생각하거나 학습할 그 무엇을 끊임없이 필요로한다.
"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이 모든 고속도로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기업에 소유되길 원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사람들앞에 자신들의 상표를 전신할 특권을 차지하기위해 기꺼이 자발적인 구매자가 된다. 기쁜마음으로 자신을 걸어다니는 광고판으로 만든다.
'나는 내가 입은 옷의 상표와 같다. 나는 내안에 화려함과 권력,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는 미쳐 날뛴다.
생산, 혁신, 투자, 삶의 리듬. 이미지의 움직임까지 속도는 모든것의 핵심.
전보는 비지니스의 결정을 앞당겼고, 전화는 1914년의 전시체제화와 같은 치명적인 군사적결정을 가속화시켰다.
"사람들은 휴식을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할 시간이 늘어난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사람들은 시계를 쥐고 생각한다. 심지어 점심식사를 할때에도 주식시장의 최신뉴스를 읽으면서 먹는다. 사람들은 마치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어떤일을 하는데 다른사람보다 적은시간을 들이는게 미덕이 되었다" - 니체 <즐거운지식) 1882년
…현대의 삶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내에 경험하는 자극의 양과 적응속도다. 자극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가 자극에 반응하고 소화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적응을 위해 생각하는 힘도 줄어든다.
…그러한 삶은 차분하게 사유하는 능력을 해치며 흥미있는 자극만 찾도록 부추긴다. 피로와 권태는 피해 과속으로 차를 몰거나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등의 단순한 말초적 신경의 흥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속도의 문화는 속도에 도취될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을 필요로하는데, 그것은 소비적인 삶이다.
구입가능한 유토피아는 매혹적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 항의하는 도중에도 노동자들은 여가생활보다는 상품구입을 통한 행복함을 선호했다.
스피드는 희망?, 스피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가장 중요한 가속화는 이미지의 돌격이다.
이미지가 세상을 휭 스치며 지나가는 속도, 다른이미지들에 자리를 내어주는 속도,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속도다.
…속도는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적이다.
…저소득 노동자들이 잠깐 기분전환하는 사치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접속되어 있다. 당신은 클릭을 하고, 전송하고, 정보를 불러내고, 다운로드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존재한다.
…기술적인 인간은 속도를 사랑한다. 그들에게 있어 속도는 헌신적인 운동이다.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그들은 무언가 진행되고 있음 그 자체를 숭배한다. 그들은 충전되어있다. 속도의 본능적인 측면은 중요하다.
… 속도는 속도를 높이는 자를 돌진하게 한다.
무한경쟁의 사회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것이 아닌 모든장소에 걸쳐있으며, 우리들 모두가 동등하게 접속할수있고 등등하게 분리될수있는 그런 장소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속도의 급류는 낯설기 짝이 없으면서도 어느덧 우리자신의 '집'이 되어버린다.
스피드광중 상당수는 무한스피드사회에서 자신이 로드킬로 전락하지않을까 공포에 의해 움직인다.
주식시장에서 '시장은 근심의 벽을 타고 오른다' 속도는 느림의 벽을 타고 오른다.
현매문명을 이끄는 것은 속도 그 자체가 아니라 속도와 느림의 변증법이다.
속도의 즐거움중의 하나는 느린자들을 뒤에 남겨주는 것이다.
빠른 사람들은 그들이 속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어떤시점이 지나면 속도의 목적이었던 효율성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육체적 기쁨 또한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질때 새롭게 녹아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끊임없는 흐름. 쉽게 쓰고 버릴수 있는 감각과 감정들에 대한 무한한 약속, 에너지와 소음의 그칠줄 모르는 불협화음.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쇼의 '불확실정과 선동'이다.
우리는 이미지속에 사는 것이지, 이미지위에 사는것은 아니다.
한개인으로서 우리는 좋든 싫든 대부분의 시간을 미디어 급류속에 항해하면서 보낸다. 이렇게 우리가 각자의 항로를 만든다면 공공성은 어떻게 되는가? 미디어의 흐름이 우리의 문명에 핵심이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있는가? 대개 '곁다리쇼'로 축소된다는것이 정답일 것이다. 사적인 삶은 과대평가하고 공적인 삶은 평가절하하는 미디어의 정치적 왜곡때문이다.
변덕스런 대중은 그저 변덕스럽다. 한번 쓰고 버리는 느낌의 시대는 열정의 순간들을 받아들인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수억 아니 수십억의 사람들이 사랑하고 또 혐오하는 니메시스이다. 미디어의 홍수속에서 적대감과 의존은 분리될수없다.
"비극적인 영웅인 갱스터는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우리가 닮을까봐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 로버트 워쇼-
한발짝 물러서서 시간을 갖고 , 전자기술의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최시 발명품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중적 전문가들을 잠시 잊어보았다.
나는 우리가 멈춰서서 제반현상을 새롭게 사고해야 하며, 미디어라는 대상을 놀라운 발명품들이 만들어낸 풍요로움이나 사회문제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삶의방식 전체를 조건짓는 핵심적 요소로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을 제안했다.
만약 우리가 미디어의 일시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적 흐름에 천착할때 비로소 우리는 채널을 돌려버리는 대신 미디어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것인지 알게될 것이다.
수많은 미디어들이 쓰나미처럼 왔다가 사라지고.. 그리고 그 흐름에 내 삶이 혹시 좌지우지되지는 않는지.
미디어에 허우적대면서 우리는 이것을 잘 산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미디어 없이 삶은 가능한지도 묻는다.
어찌보면 미디어 자체가 삶이 되어버린 우리들. 정말 잘 살고 있는건지. 우리, 잠시 미디어들을 내려놓고 돌아보자.
그리고 분명 우리 현대인의 삶에서 떼어놓고 살수는 없을께다. 그렇다고 그 속에 파묻혀 허우적 대는 삶을 그대로 놔두는 것도 아닌것 같다. 결국 어떻게 살아낼것인가를 묻는지도 모르겠다.
이책은 미디어홍수속에서 우리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물어본다.
미디어에 자신과 삶이 전부가 되어버렸다고 느낀다면, 꼭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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